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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의 법, 가격상한제법(The Law of the Maximum / La loi du Maximum)이란?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 피에르 1791년 프랑스 식량, 생필품 공급 규제를 위한 가격상한제법 시도 와 실패

by dgr83 2021.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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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의 법, 가격상한제법(The Law of the Maximum / La loi du Maximum)이란?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 피에르 1791년 프랑스 식량, 생필품 공급 규제를 위한 가격 상한제법 시도와 대실패

 

최대의 법, 가격상한제법(The Law of the Maximum / La loi du Maximum)을 들어보셨을까요? 아마 생소하실 수 있습니다. 이는 1791년 프랑스 정부가 당시 식량문제, 생필품 등의 가격을 통제가 힘들어지자, 가격을 통제하고자 가격 상한제를 포함하여 발의한 법안이며, 결과적으로 대실패 하여 더욱 식량 문제를 심각하게 만든 법이기도 합니다.

 

관련하여 최근에, 

프랑스가 우유값을 안정시키는 방법,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 피에르

이라는 글인 인터넷에서 유행했는데, 이는 정확한 사실은 아니지만 해당 법 제정 시기에 이야기이긴 합니다. 어느 정도 관련 인물이 나오기도 하고요 나오고요.

 

프랑스 단두대의 이미지
프랑스의 단두대

프랑스혁명 시기, 권력을 잡은 로베스 페이스가 식료품값, 우유값 등이 오르자 서민을 위한 답시고 우유값을 통제한다. 가격 상한제가 생기는데, 지정을 한 우유값보다 더 비싸게 받으면 단 두데에 끌고 가니 단기적으로는 우유값이 잡혀 보였지만, 우유값이 내려가니 우유 소비가 늘어나고 금방 매진되기 일수였다.

 

젖소를 키우는 사람들은 우유를 팔아봐야 사료 값도 안 나오니 젓소를 오히려 도축 시장에 팔았고, 우유는 점점 더 귀해갔다.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우유값은 역대 최고가였다.

 

이 모든 것이 사료값 때문이라고 생각한 로베스 피에르는 사료값을 지정했고, 사료값을 올리는 사람은 단두 대행이었는데,

 

이 역시 처음에는 효과가 있었지만, 건초를 생산하는 농부들이 건초를 팔아봤자 이익이 없으니 그냥 건초더미를 불태워버렸다. 이후 젖소가 먹을 건초가 없으니 우유 생산량은 더욱 급감하였고 우유 가격은 결국 대 폭등, 민중 폭동이 일어났다.

 

이후 로페스 피에르는 단두대로 끌러가는 신세가 되었다.

 


혹자는 쌩구라다, 거짓 선동 글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그 정도는 아니고 많이 각색된 글이라 보면 좋을 거 같습니다. 큰 맥락은 이러한 긴 합니다. 우유값 만이 문제가 아니었고, 생필품 전반에 저런 일이 시행되었습니다. 로베스 피에르가 죽음은 딱 이 가격 상한제법 때문이라고 보긴 어렵고 이것도 하나의 이유라고 보는 것이 좋을 거 같습니다. 정치적으로 밀려나 쿠데타로 죽었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이고요.

 

뭔가 위의 글은 마 시밀 리앙 드 로베스 피에르를 굉장히 우둔한 인물인 양 그렸지만, 나름 프랑스의 위대한 혁명가, 정치가로 인정받는 인물이며, 프랑스 공화국의 슬로건 자유, 평등, 우애 역시 이 사람의 작품입니다.

 


생필품 가격 상한제 실시 이야기

로베스피에르는 생필품 가격상한제 법(The Law of the Maximum / La loi du Maximum)을 통과 이 법은 식품의 공급과 가격을 규제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주로 수도 파리의 상 퀼로트 들을 만족시키고 달래기 위해서였다. 사실 프랑스는 1793년 경에, 임금과 생필품의 가격 그리고 파리의 생활환경은 1789년의 대혁명 발발 이후로 거의 개선된 것이 없었다. 특히 당시 프랑스는 유럽과 전쟁을 벌이는 상황이라 프랑스의 수출과 수입이 감소된 상황이었고 국내 무역은 무너져가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전쟁을 위해 많은 병력을 동원하고 지방에서는 이러저러한 많은 사건들로 농업 생산이 붕괴되고 있었다.

 

1793년 초, 파리의 상 퀼로트 들은 국민공회(National Convention/la Convention nationale)로 하여금 식량부족 문제를 해결하고 천정부지로 치솟는 물가를 해결하기 위해 뭔가를 할 것을 촉구하고 있었다. 이런 캠페인을 주도하던 자들을 어보 아지(=앙라제)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정치적인 정당에 속한 자들은 아니었다.

 

높은 식품 가격을 통해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믿으면서 그런 자들에 대해 분노하는 일군의 화난 사람들이었다. 이들 '화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주목받던 인물은 자크 루(Jacques Roux,1752-1794)라는 가톨릭 성직자이자 급진적인 운동가였다. 그는 일관되게 경제적으로 평등한 세상을 부르짖었다.

 

자코뱅파가 부르주아적인 무기력함을 보이고 있다고 성토하였다. 그는 누구라도 모든 이가 식품을 구할 수 있어야 함을 주장하고 물건 사재기를 하는 부자들을 처형할 것을 주장하였다. 극단적인 급진주의 때문에 후에 그에게 '붉은 사제(Red Priest, le curé rouge)' 또는 작은 마라(le petit Marat)라는 별명이 붙었다.

 

자크 루의 열렬한 연설은 당시 자코뱅들이 장악하던 국민공회에 거의 영향력이 없었지만 상 퀼로트를 비롯한 평민들이 있는 파리의 거리에서는 그의 연설이 크게 먹히고 있었다. 1793년 2월이 되자 파리에서 폭동이 연이어 발생하였다. 이 폭동들은 처음에는 거의 전적으로 여성들이 일으켰는데 빵, 설탕, 커피, 비누 등의 생필품 가격이 폭등하는 것에 대해 항의하면서 발생한 것이었다.

 

폭동의 서막

2월 말이 되자 남자들도 가세하면서 가격을 내리는 것을 거부하는 빵가게 주인과 식료품 가게 주인들에게 폭력으로 위협을 가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식품 폭동들은 빵 부족 상황이 완화되기 시작하던 3월 초까지 지속되었다. 1793년 3월부터 6월 사이의 기간 동안 당시 국민공회는 주로 전쟁 문제에 집중하고 있었으며 또한 지롱드 파와 급진 자코뱅인 몽테뉴 파가 서로 권력투쟁을 하던 때였다.

 

자코뱅과 같이 하던 급진적인 언론인들은 높은 식료품 물가에 대한 비난의 화살을 온건파인 지롱드 파에게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대중들은 지롱드 파 인사들이 지방 세력, 사업적 이득을 보는 세력, 그리고 부르주아 세력들과 결탁된 자들이라 여기게 되었다.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이러한 낙인은 지롱드 파들을 식품 공급 문제와 관련되어 희생양으로 만들었다. 1793년 5월 초, 파리의 자코뱅들은 식품 정책과 관련하여 상 퀼로트 편을 들기 시작했다.

 

이는 계산된 움직임이었는데 이로써 대중의 지지를 얻어 지롱드 파를 영원히 없애버리기 위해서였다. 이때껏 식품 문제로 폭동을 일으킨 상 퀼로트에게 동조하지 않았던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는 식량을 비축해 놓은 자들과 가격 투기세력, 이를 통해 폭리를 취하던 자들에게 불호령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5월 4일, 국민공회는 가격통제를 위한 첫 조치로 밀과 밀가루의 가격을 고정시켰다. 이에 지롱드들은 가격통제를 반대했다. 왜냐면 가격이 오르면 식품 공급이 증가할 것이고 그러면 물가도 결국 떨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특히 자코뱅들은 이런 경제조치를 취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의도했던 효과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상 퀼로트들이 자코뱅파와 몽테뉴 파의 편을 들기 시작한 것이다. 상 퀼로트 들은 지롱드 파들을 국민공회에서 축출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1793년 5월까지 대중들의 압력이 계속되었고 결국 6월 2일에 지롱드 파들은 축출되었다. 이로써 자코뱅파와 몽테뉴 파들이 공회에서 완전히 승리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로써 이제부터의 파리의 경제 상황에 대해서 그 책임을 오롯이 자코뱅들만이 지게 되었다. 한마디로 더 이상 남 탓하며 비난할 대상, 희생양으로 삼을 대상이 없어지게 되었다. 1793년 6월 25일, 자크 루는 공회 내에서 열성적인 연설을 하였다. 후에 이 연설을 '화난 사람들의 성명서(매니페스토)(Manifesto of the Enrages) '라 부르게 되었다.

 

이 연설에서 그는 자코뱅파와 몽테뉴 파가 상퀼로트들의 요구에 충분히 호응하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하면서 물품을 독점하고 높은 가격으로 이득을 취하는 자들에게 자코뱅과 몽테뉴 파가 엄벌을 취해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프랑스 인민의 대표 여러분! 이기주의자들과 사기꾼들의 범죄행각에 대한 성토가 이 신성한 공회 건물 내에서만도 일백 번 울려 퍼졌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항상 당신들은 저 인민의 거머리들을 박살 내주겠다고 약속했었습니다. 이제 곧 새 헌법 조항들이 승인 절차를 거칠 예정입니다. 그런데 새 법 조항 안에 투기를 금지하는 내용이 들어갔습니까? 아니요! 독점 업자들을 사형시킨다는 내용이 들어갔습니까? 아니요! 상업의 자유를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적시하였나요? 아니요!

 

~~~

 

자! 당신들은 인민의 행복을 위해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선언하였습니다.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굶주리게 할 수 있다면 자유는 단지 헛된 환상일 뿐입니다. 부자들이 독점력을 써서 사람들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권한을 행사할 때 평등이란 단지 헛된 환상일 뿐입니다.

 

생필품 가격을 가지고 반혁명이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그래서 시민들이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눈물을 흘린다면 공화국이란 단지 헛된 환상일 뿐입니다. 상업에서의 강도질을 중단해야 합니다. 상업에서의 강도질과 상업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당신들이 혁명으로 데려온, 당신들이 새 헌법 쪽으로 집결시킨 상 퀼로트들의 손에 식품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해줘요만 이것들(자유, 평등, 공화국)이 가능합니다.

 

~~~

 

 

화난 사람들의 성명서(1793년 6월 25일)- 자크 루의 이의제기를 살피는 대신, 자코뱅들은 그를 침묵시키고자 하였다. 장 폴 마라는 그의 신문인 인민의 친구(L'Ami du Peuple)에서 자크 루를 사고뭉치라며 맹비난했다.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무리들은 장 폴 마라 편을 들었다. 8월경에, 자크 루는 날조된 것으로 강력히 추정되는 죄명으로 감옥 독방에 갇히게 되었다.

 

자크 루의 자극적인 화술은 폭동을 촉발시키고 있었다. 자코뱅파가 주도하는 정국을 자크 루가 위협하고 있다고 걱정을 한 로베스피에르는 그가 혁명정부를 붕괴시키고자 하는 외국 간첩이라는 혐의를 씌워 고발하고 감옥에 넣었다. 나중에 1794년 2월 10일, 혁명재판소에서의 재판을 기다리던 자크 루는 옥중에서 칼을 이용하여 자살하였다.

 

그의 나이 41세였다. 자크 루가 사라졌지만 상 퀼로트 들을 침묵시킬 수 없었다. 상 퀼로트 들은 공회 측이 조치를 취해줄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였다.

 

1793년 9월, 이들은 공회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청원을 냈다.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다. 귀족들은 박살이 났지만 여전히 새로운 엘리트들과 상인들, 그리고 식품 투기꾼들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부자들이 더 부자가 되는 상황에 왜 상 퀼로트 들은 자신들의 피를 조국을 위해 흘려야 하는가? 왜 상 퀼로트 들은 떨쳐 일어나 그들이 왕과 귀족들에게 했던 것처럼 부자들의 목을 치기 위해 일어서지 않는가? 만약 당신네들이 가격 상한제를 실시하지 않는다면 부자들의 목을 치는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이 청원이 일어나 며칠 후인 9월 29일, 공회는 가격 상한제 법(the Law of the Maximum, 또는 the General Maximum##)을 통과시킴으로써 상 퀼로트들의 청원에 응답하였다.

 

이 급진적인 법은 30여 가지가 넘은 필수품들(대부분 식품이었다.)의 가격에 상한을 설정하였다. 상한가가 설정된 물품들 중에는 신선육, 소금 간을 한 육고기, 베이컨, 버터, 올리브유, 소, 소금에 절인 생선, 포도주, 브랜디, 식초, 사이더, 맥주, 장작, 석탄, 숯, 양초, 램프 오일, 소금, 소다, 설탕, 꿀, 종이, 가죽, 철, 주철, 납, 강철, 구리, 삼(hemp), 마직류(linens), 모직류(woollens), 나막신, 신발, 순무(turnips), 유채 씨(rapeseed), 비누, 담배, 칼륨 등이 대상이었다. 상인들은 그들 가게 바깥이나 창문에 법에 따라 모든 판매 물품의 최고 가격 목록을 보이게 붙여 놓게 강제되었다.

 

만약에 이들 가격 중에 법으로 정해진 최고 가격을 초과하는 것이 있으면 일반 대중들이 관계 기관에 알리도록 만들었다. 상인들은 최고가격을 위반한 가격의 두 배를 벌금으로 내도록 하였다. 재미있게도, 그 벌금은 관청에 내는 게 아니라 위반을 알린 사람이 받도록 하였다. 이런 가격통제 법은 또한 삯(wages)에도 적용시켰다.

 

물가와 삯에 고정된 제한을 가한 이 조치는 좋은 의도에 기반한 것이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재앙이었다. 강제로 부과된 제한으로 인해 농부들과 생산자들은 생산 의욕을 잃게 되었다. 이들은 실제 가치보다 낮은 가격에 파는 것을 포기하고 덜 생산하거나 생산한 것들을 숨겨 쌓아 놓기 시작했다.

 

그래서 도시와 마을로 들어오는 식품의 양이 줄어들었고 이 때문에 식품 부족은 더 악화됐다. 게다가 중간에서 이도 저도 못하는 자들은 도시의 소매업자들과 쁘띠 부르주아들(가게 주인, 정육점 주인, 빵집 주인, 시장 가판대 업자)이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원가와 매가의 차이가 극히 적은, 작은 이윤으로 버텨나가고 있었다. 결국 정직한 상인들이 최고가격제의 희생자가 되었고 부패하고 비윤리적인 자들은 이를 악용하였다. 정육점 주인들은 질 좋은 고기보다는 고기 부스러기를 이전보다 더 많이 붙여 고기 무게를 쟀다.

 

가게 주인들은 최고가격제로는 1급보다는 2급 제품을 팔았다. 대중들은 품질에 불만이 많아지게 되었다. 이때 얼마나 품질이 나빴냐면 포도주를 샀지만 배 주스였고, 올리브유를 샀지만 저질 기름을 사게 되었고, 후추를 샀으나 재가 들어있는 후추였으며, 설탕을 샀지만 전분가루가 섞인 설탕이 있을 정도였다.

 

더욱이 불법적으로 상품을 팔고 더 많은 가격을 지불할 용의가 있는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암시장이 창궐하였다. 가격 상한제로 설정된 가격은 1790년의 물가 수준의 133%에 해당하는 가격 수준이었다. 그런데 정부에서 최고 가격을 정할 때 운송비용을 과소하게 설정하였기 때문에 생산자들은 자신들의 상품을 상품을 필요로 하는 시장에 내다 팔 기 보다는 가장 가까운 시장에 내다 팔게끔 만들었다. 이 때문에 전국에서 최고 가격의 통제를 받는 식품들을 구하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이에 따라 암시장에 의존하거나 추가 비용을 지불해야만 구할 수 있게 되었다. ~~~

 

 

최대의 법이란? 링크 자료

https://alphahistory.com/frenchrevolution/law-of-the-maximum/

 

The Law of the Maximum

The Law of the Maximum refers to price-fixing economic policies passed by France's National Convention in 1793.

alphah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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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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